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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와 종단 上 - 학교 통합종단 귀속과정 0
 작성자: 석림동문회  2010-10-11 17:01
조회 : 4,184  

 

 종단의 스님들이 동국대학 법인 이사회로 들어간 뒤 처음 열린 이사회를 마치고 한자리에 섰다. 이사장 경산스님, 벽안스님 등이 이사로 선임됐다.<사진 위> 통합종단 출범 후 비구측에서 처음으로 선출한 김법린 총장은 불교발전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1963년 11월 개원한 대학선원도 그 중 하나다. 아래 사진은 당시 대학선원 모습.                 사진출처=<동국 100년사>

  

통합종단 이후 東大 첫 총장 취임…종단-학교 ‘긴밀’

  

1962년 11월 비구스님 5人 3개월 시한부 임시 이사 선임

대처승 총장 정두석스님 비구측 이사진과 갈등…“사퇴 촉구”

종단의 유일한 4년제 종합대학인 동국대학은 불교계의 자랑이면서 동시에 갈등의 진원지다. 동국대는 가장 많은 인력과 인재가 포진해 있으며 예산도 가장 많다. 국가의 중앙부처에 해당하는 총무원이 특별예산을 합쳐 200억원이 채 되지 않는 반면 동국대학은 5000억원이 넘는다. 수천명에 이르는 인력과 막대한 예산을 운용하는 동국대학을 두고 종단은 지금까지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갈등의 구체적 내용은 학교법인 이사회 선임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종단 스님들이 당연직 이사로 다수 포진하는데 종단의 역학관계가 법인 이사회에 그대로 투영되는 것이다.

동국대학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갈등이 빚어진 것은 아니다. 일제시대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출발할 당시부터 동국대학이 학교로 제자리를 찾을 때까지 불교계가 전폭적으로 재산을 출연하고 지원했다. 인재를 양성해 불교현대화의 역군을 양성하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신식학교를 만들 때 전 사찰과 종도들이 사찰 재산을 처분하고 돈을 모았다. 중앙불전에서 혜화전문학교로 그리고 동국대학으로 발전을 거듭할 때 모든 사찰이 힘을 보탰다. 그 결과 동국대학은 불교계 인재의 집합소이며 불교 발전의 원동력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학교가 성장하면서 서로 불편한 관계가 조성되기도 하고 종단은 학교를 지원하기보다 장악하는데 더 관심을 갖기도 했다.

동국대와 종단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을 맺게 된 것은 통합종단 이후부터다. 1954년 정화운동이 시작되고 1955년 비구승 중심의 종단이 탄생한 뒤 지방의 사찰은 ‘정화’를 거쳐 비구승단으로 귀속된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불교재산관리법에 의거해 유일한 불교 종단이었던 조계종단으로 사찰과 각종 신도단체 등이 등록을 했지만 동국대학은 여전히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었다.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스스로 운영을 하지 못해 ‘불능’ 진단을 받아 반 관영체제였다.

1950년대 후반 동국대는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1956년 7월 이후 당연직으로 되어있는 총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시이사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통합종단 출범 후 종단은 동국대를 종단으로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1962년 4월 통합종단이 출범하고 7개월 뒤인 1962년 11월14일 통합종단 체제로 전환하는데 그때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를 <동국100년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국학원이사는 비구측과 대처측이 갈등하자 이사회 구성에 상당한 어려움이 생겼다. 문교부는 불교재건위원회의 출범이 한창 논의되고 있던 1962년 1월1일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 제20항에 의거하여 분규 재단의 관선이사로 성인기, 권오익, 박형준, 박성대, 최현배 등을 위촉했다. 1962년 5월23일에는 이희승, 김증한 등을 관선이사로 추가했다.”

그리고 재단은 1962년 11월14일 3개월 기한부로 김영주.손경산.김서운.박벽안.이능가스님을 임시 이사에 선임하면서 드디어 비구승 중심의 종단으로 완전히 귀속되었다. 하지만 이는 불완전한 정상화였다. 조계종단 스님들은 시한부 임시 이사였고, 총장은 대처승인 정두석스님이 맡고 있었다. 종단에서 파견한 스님들은 정두석 총장의 실정을 거론하며 퇴진을 촉구했다. <동국100년사>는 이에 대해 “해묵은 갈등이 빚어졌다. 임시이사들은 정두석 총장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누고 학교 운영에 대한 실책을 거론했다. 거론된 내용은 판공비 초과지출, 인쇄소 운영 및 기자재 구입, 도서구입 부당성 등이었다. 이는 관선이사 시절 일이었다. 임시 이사들은 1963년 3월7일자로 문교부에 총장 해임서를 제출하고 18일에는 교원징계위원회에 징계서를 제출했다.”

비구측인 이사들과 대처측인 총장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자 학생들까지 나서 만류했다. 5.16 이후 만들어진 동국대 ‘재건학생회’는 <동대신문>에 성명서를 발표, “재단이사측과 현 학교 책임자간에 야기된 분규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동시에 종단은 비구 대처의 장시간에 걸친 분규를 지양하고 동대 발전에 거교적으로 노력할 것. 재학생 및 전 동대인은 대학의 질적 향상과 권위를 높이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 문교당국은 대화의 자주성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분규의 근본적 선결책을 조숙한 시일내 강구할 것” 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내걸었다.

1963년 김법린 총장 취임…“역경 도제양성 포교에 혁혁한 공”

종단 중심 전국 사찰도 토지.영림으로 학교 지원 적극 나서

정 총장은 나름대로 학교발전안을 제시하고 학생 동문들이 거중 조정에 나섰지만 문제는 학교 정상화가 아니었다. 당시 종단은 막 정화를 마무리 짓고 본격적으로 불교현대화, 인재 양성 등 정화의 본래 목적을 완수하는데 매진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수한 교원을 확보하고 있는 동국대의 지원과 협력이 절실했다. 동국대가 종단 정화와 발전에 선두적 역할을 해야 하는데 대처승 출신 총장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종단에서 파견한 이사들은 새로운 총장을 맞아 종단과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동국100년사>는 이에 대해 분쟁의 중재 화합 노력에만 초점을 맞춰 기술했지만 종단으로서는 총장 교체가 절실한 문제였다. “상황이 지속되자 정 총장은 김상조 학생처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이희균 교수를 학생처장에 기용하여 ‘가이던스 센터’를 설치하기로 하는 등 재단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학생과 동문들도 나서 화해와 조정을 시도했다. 그러나 학생과 동문들의 호소와 조정에도 불구하고 문제 해결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문교부는 재단 이사들의 주장에 이유 있다는 판정을 내려 그해 7월20일 정두석 총장이 사퇴했다.”

왜 당시 종단 이사진들이 총장 사퇴를 줄곧 요구했으며, 그 시도가 옳았다는 점이 정 총장 후임으로 취임한 김법린 총장이 말해주었다. 1963년 7월30일 김법린 총장이 취임했다. 김 총장은 범어사 스님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독일에서 유학한 당대 최고의 지성인었다. 이승만 정부에서 문교부 장관을 역임, 행정 경험도 풍부했다. 그 역시 대처승이었지만 김 총장은 정화를 지지하고 통합종단의 발전에 적극 기여했다.

김 총장이 짧은 총장 재임동안 이룩한 업적은 이후 불교 발전의 토대가 되었으며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역경 도제양성 포교라는 종단 3대사업이 나온 것이 김 총장 취임 후이며 동국대학은 3대사업 실현의 중심지였다. 동국대학에 역경원을 설립하고 종비생 제도를 만든 것이 바로 김 총장이었다. 종단 이사진들이 총장 교체를 줄기차게 요구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던 셈이다. 김 총장은 취임사에서 대학발전을 위한 6개 주요 시책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학문 제일주의를 바탕으로 완전한 학풍 수립, 교수회의 강화 등 학교와 종단, 불교 발전이었다.

김 총장은 취임 후 가장 먼저 불교학 발전과 종단 발전에 나섰다. 불교대학장에 조명기 교수를 선임하고 1962년 개원한 첫 연구소인 불교문화연구소에 각종 부설기관을 개설했다. 이어 8월30일에는 대학박물관을 개관했다. 11월20일에는 대학선원을 개원했다. 지금 사범대학 자리가 대학선원이었는데 원래 일제시대 사찰로 당시에는 도서관 사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를 개조해 선원을 만들었다. 초대 원장은 백양사의 석호스님 즉 서옹스님을 모셨다.

현재 인천 용화사의 송담스님이 입승이었으며 박성배 교수가 간사, 이영자 불교학과 명예교수가 서기를 맡았다. 2대 임원진에는 탄허스님이 원장을, 김항배(철학과 명예교수) 교수가 간사, 이영자 교수가 서기였다. 후일 정각선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리도 지금 위치로 이전한 대학선원은 이듬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대학생수도원의 산실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김 총장은 또 ‘거룩한 삼보의 언덕위에 한 줄기 눈부신 동국의 빛’ 으로 시작되는 불교내용으로 된 새로운 교가를 이은상에게 의뢰하는 등 불교 건학이념을 살리는데 노력한다. 이해 겨울에는 종단 중진스님들을 대상으로 첫 강습회를 개최하며 그 여세를 이어 1964년 종비생 1기를 선발한다. 이어 4월에는 역경원을 개설한다. 그 전 1963년 12월31일 불교대학 내 인도철학과를 개설한다. 말년에 불교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한없이 기쁘다며 좋아했던 김 총장은 짧은 시간 종단을 위해 수많은 업적을 남기고 1964년 갑자기 심장마비로 순직한다.

학교가 불교발전에 기여한 것처럼 종단과 사찰도 학교발전을 위해 발벗고 나섰다. 개교 때처럼 각 사찰은 토지와 당시로서는 가장 큰 재산인 영림으로 학교를 지원했다. 종단과 사찰은 사립학교법 개정에 따라 학교가 정부의 감독아래 들어가 기존에 출연했던 사찰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를 학교 재산으로 환원하는 조치를 단행한다. 이는 종단과 사찰이 학교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불교신문 2662호/ 10월13일자]

2010-10-09 오전 10:25:28 / 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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