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제1기 종비생 10명의 졸업식 모습. 이들은 졸업후 순회포교사로 전국의 사찰 포교당에서 불법을 설파했다.
수료생들은 급히 월정사로 갔다. 이유는 1월19일 대처승들이 월정사를 침범한 사건 때문이었다. 대처승과 이들이 동원한 사람 등 모두 100여명이 신도들에게 몽둥이와 흉기를 휘둘러 20여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월정사에 살던 대처승측이 승소해 강제 퇴거 조치하면서 발생했다. 당시 상원사에는 수좌들이 동안거를 나고 있었다.
1964년 1월 임시종회서 종비생 선발규정 확정
일타스님 “승니강습회 全 수료생 동국대서 수학” 주창
김법린 총장 “등록금 생활비 지원…기숙사 짓겠다” 약속
당시 상원사에는 월탄스님이 동안거를 나고 있었다. 1960년 대법원 할복 6비구로 정화에 적극 가담했던 월탄스님은 일타스님 행원스님 등 종단의 중요 소임자 스님들과 안면이 많았다. 마침 동국대에서는 150명의 스님들이 제1회 승니강습회 연수차 매일 모여 공부 중이었다. 이들을 월정사로 급히 모셔오는 안이 결정됐다. 월탄스님은 그 날 밤 택시를 대절해 서울로 향했다. 논란 끝에 월정사를 보호하자는 안이 결정 났다. 버스 3대에 분승해서 월정사로 왔다. 월탄스님의 증언이다. “도착하니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대처승 100여명이 올라오고 있었다. 월정사에는 기껏 20여명이 모여있을 것으로 생각한 이들은 월정사 경내로 들어오는 언덕 아래에서 밤새 숫자가 200여명으로 불어난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멈칫했다. 이들은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쫓겨 내려갔다.”
월정사를 지키면서 자연스럽게 종단의 앞날에 대한 토의가 벌어졌다. 일행들 틈에는 김법린 총장도 있었다. 김 총장은 비구측이 자꾸 당하는 이유는 학력이 낮아 사회적으로 무시당하기 때문이라며 스님들도 현대식 학문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시 월탄스님의 증언이다. “김 박사의 강의를 들은 스님들은 즉석에서 결의했다. 승니강습회에 참가한 수료생들이 모두 동국대 불교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자고 일타스님이 주창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스님들이 모두 동참 결의를 하며 서약서를 썼다.” 김 총장은 학교가 전부 등록금과 생활비를 대고 기숙사를 짓겠다고 약속했다.
월정사서 올라온 스님들은 즉시 종회를 열고 종비생 제도를 확정한다. 1964년 1월25일 제6회 임시종회에서 종비생 선발 규정을 확정하고 인도철학과와 불교학과에 각 10명씩 20명을 입학시킨다고 결정했다.
스님들은 그러나 막상 등록일이 다가오자 월탄스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원서를 내지 않았다. 월탄스님의 증언이다. “학교에 원서를 내고 보니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하지 않겠다고 했더니 당시 법인 사무국장 법안스님이 월탄스님마저 신청하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서류를 돌려주지 않아 할 수 없이 시험을 치렀다. 그런데 사실은 스님들은 시험도 안치고 그냥 선발한다고 했는데 대학선발고사와 학교 시험 모두 치러야 한다고 해서 난감했었다. 일타스님께 항의했더니 ‘해인사 판전에서 부처님께 기도하고 수행하며 산다고 발원했는데 다시 공부한다면 그 약속을 어기는 셈이 되다 보니 원서를 내지 않았다’고 하시더라. 중진 스님들은 아무도 없고 한번도 본적이 없는 젊은 스님들만 보였다.”
현해스님은 은사스님이 만류했지만 공부에 대한 열망 때문에 도전했다. 당시 종비생들은 현대 학문에 대한 열망과 대학 공부에 대한 도전과 동경이 겹쳐 개인적으로 신청한 경우가 적지 않다. 당시는 대학가면 장가간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종비생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다. 이는 종단의 원로 스님들에게 특히 심했다. 영암스님이 대표적이다. 영암스님은 공부를 잘해 유학생으로 선발돼 일본까지 갔지만 3개월만 공부하고 되돌아왔다. 하지만 같이 가서 공부했던 스님들은 모두 대처승이 됐다. 대처승들의 대부분이 일본 유학길에 올라 공부한 뒤 장가를 갔는데 비구승들은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대학공부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는 종단에서 종비생 지원을 중단한 이유로도 작용했다.
종비생 1기생은 15명이 입학해 2명이 첫해에 탈락해 실제로는 13명이 다녔다. 원래 합격자는 12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불교신문에 나온 합격자 명단은 불교학과 5명, 인도철학과 7명이다. 신문은 16명이 지원해서 12명이 합격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현재 동국대 종비생들의 모임인 석림동문회가 취합한 명단도 다르다. 이처럼 제각각인 이유는 종비생으로 들어온 스님과 개인적으로 들어온 스님들이 뒤섞이면서 발생한 혼란으로 보인다.
1기생들은 대학 선발고사를 치르고 다시 2월16일부터 20일까지 실시한 동국대 입학고사를 거쳐 합격했다. 제1기생에는 종비생의 상징으로 인정받는 월탄스님과 동국대 법인 이사장을 역임한 현해스님, 제3기 군종법사로 임관해 군승 최초로 최고계급에까지 이르고 현재 군종교구장을 맡고 있는 자광스님, 중앙종회의장을 역임한 지하스님, 부산 만덕사 주지 혜명스님 등이 있다. 또 첫 해군 군승이며 불교 출판 발전에 많은 공을 세운 도서출판 홍법원의 김정길씨, 공군 군승이며 오랫동안 직지사 수련원장을 지낸 법일스님(속명 이양길) 등 종단 발전에 영향을 끼친 인재들이 많았다. 몇 명은 작고했으며 환속한 분들도 있다.
1기생들은 급하게 결정되다보니 지낼 곳도 없었다. 당시 종단 교무부장 행원스님이 화계사 큰방을 내줬다. 비구승들은 1년6개월간 화계사 큰방에서 지낸 뒤 화계사 입구에 백상원이 건립되면서 옮겼다. 백상원은 이후 1989년 다시 신축해 1991년 준공했다. 하지만 이마저 낡고 비가 새 다시 신축중이다.
종비생의 원래 취지는 종단이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고 기숙사에서 단체 수행생활을 하는 제도지만 이 원칙이 지켜진 것은 1기와 2기 뿐이다. 종비생 제도는 예산 종회가 열릴 때마다 논란거리였다. 돈이 없으니 줄이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종비생 제도 시행 1년만에 종회에서 숫자를 5명으로 줄이고 결국 본말사 부담으로 변화한다. 은사가 부담케 하자는 안도 나오는 등 종단은 종비생 제도를 부담스러워했다.
종비생 1기 15명 화계사 큰방살이…1965년 백상원 건립
김 총장 타계 종비생제 ‘휘청’…종비생 모임 석림회 구성
“종비생 제도…우여곡절 많았지만 한국불교 발전 원동력”
1965년 제8회 종회에서 행원스님은 “82점의 성적으로 학업이 우수하고 연중 1인당 평균4600원 상당이 소요됐다. 이 돈에는 교재 특활비 기성회비까지 포함된 금액이다. 주식대는 종단에서 대고 부식은 화계사에서 조달 공급하는데 금년도는 예산을 확보해 명실공히 종비생의 여건을 보장해 주어야 겠다”고 보고한다. 종회는 그러나 2기생을 5명만 선발하겠다고 결의한다. 10명과 5명 안을 놓고 표결에 부친 결과 16대 6으로 5명안이 통과됐다. 같은해 11월 열린 1966년 예산 종회에서는 본사가 1년 10명의 종비생을 선발하되 교구는 2년마다 1명씩 파송하는 것으로 결의한다. 종단의 어려움은 컸다. 종비생들을 양성하기 위해 사찰림을 팔거나 임대해 돈을 마련했다.
1966년에는 수종사 임야를 팔아 그 중 200만원을 종비생 장학금으로 예치했다. 1966년 12월 열린 종회에서 종비생 모집 중단을 결의한다. 그러나 종비생들이 나서 총무원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하며 격렬하게 반발해 제도는 유지된다.
종비생들이 입학하기 전 부터 동국대에 재학하던 스님들이 있었다. 이 스님들을 석림동문회에서는 ‘0기’로 부른다. ‘0기’에는 무진장스님, 인환스님, 혜성스님(전 도선사 주지), 광우스님, 명성스님, 묘엄스님, 상호스님(서울 보명사), 김준형거사(법명 공철), 정창문(법명 정달) 등이 있다.
종비생들은 1965년 석림회를 만든다. 9월21일 ‘대학선원’(현재의 정각선원)에서 종비생 대표들이 모여 종비생 중심 모임을 결성키로 하고 그 명칭을 2기 종비생 호진스님의 제의로 석림회로 정했다. 석림이란 명칭은 서로 탁마하고 의지하는, 부처의 후예들이 숲을 이룬다는 뜻에서 정했다고 한다. 1965년 10월16일 대학선원에서 홍정식 박사, 김동화 박사 등을 모시고 회원 및 간부 선출, 사업계획 토의 등이 있었으며 초대회장에 불교학과 4학년 김공철스님을 선출했다. 석림회의 사상과 의견을 담은 학술지 <석림>은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1968년 7월 제1집이 나왔다.
제2기는 1965년 8명(비구니 2명)이 입학했으며 제3기는 8명(비구니 5명), 제4기는 15명(비구니 5명)이었다. 제5기가 들어가는 1968년에는 그러나 단 3명만이 입학했다. 종단과 학교는 10명을 뽑기로 했는데 학교측이 약속을 어긴 것이다. 학교는 성적이 나빠서 3명만 합격시켰다고 했지만 근저에는 종단과 학교간의 불편한 관계, 종단이 본사에 일률적으로 할당시켜 성적이 되지 않는 스님을 추천한 점, 종단 파견 이사의 불성실한 태도 등이 겹쳐 10명이 3명으로 줄어드는 결과가 나왔다. 무엇보다 종단의 발전과 현대화를 위해 학교가 적극 나서겠다는 원력을 세워 종비생 제도를 만들고 역경원을 세웠던 김법린 박사가 갑자기 타개한 뒤 학교 측과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결정적이었다.
제1기 종비생들 중 8명이 4년 뒤인 1968년 2월28일 졸업했다. 종단은 그러나 현대 교육을 받은 최초의 종비생들을 활용할 방침을 세우지 않았다. 군승제도는 여전히 국방부와 협의 단계였다. 졸업생 중 진형스님과 지연스님은 군에 입대 예정이었다. 종단은 종비로 졸업한 스님을 방치한다는 비판 여론이 일자 이 해 4월 졸업생 중 군 입대자 2명을 제외한 6명에게 포교사 자격증을 품수해 지방을 순회토록 했다. 월탄스님, 현해스님, 탁도안스님이 영남반에, 혜경스님(비구니), 길상스님, 혜명스님, 공철스님 등과 함께 호남반에 편성돼 순회 포교에 나섰다. 스님들은 4월2일부터 18일까지 지방을 돌며 불교를 전파했다.
1969년 느닷없이 종비생들에게 교복을 착용하는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학교측은 종비생도 학생이기 때문에 교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일부 스님들도 학생들로부터 소외된다며 교복 착용을 지지해 종앙종회에서 논란이 일고 당시 불교신문 논설위원 법정스님이 신문에 ‘사문(沙門)의 옷을 벗기지 말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하는 등 한동안 파장이 일기도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종비생 제도는 이후 한국불교 발전의 큰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불교 현대화와 불교학의 발전을 이끈 주역들이 바로 종비생 출신들이며 환속한 스님들이 많았지만 이들 역시 불교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불교신문 2624호/ 5월19일자]
2010-05-16 오후 1:23:26 / 송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