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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 영랑사 주지 상준 스님...(47기,2010학번) 0
 작성자: 석림동문회  2024-06-17 15:28
조회 : 8,172  

분별하는 그 마음 내려놓으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포대화상은 짊어지고 있는 짐 그냥 내려놓는 게 ‘도’라고 강조
‘좋다’ ‘싫다’는 분별심이 괴로움의 원인…내려놓을 줄 알아야 
허망한 마음을 놓고 불퇴전으로 정진한다면 그 자리가 불국토

상준 스님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무상하기에 영원히 좋은 것은 없다”며 “분별심을 버리고 묵묵히 정진해 나가는 것이 행복해 지는 비결”이라고 강조했다. 

오늘은 포대화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포대화상에 대해 잘 아시나요? 절에 가면 배를 쑥 내놓고 호탕하게 웃고 있는 분이 바로 포대화상입니다. 포대화상은 원래 중국 당나라 때 살았던 스님으로, 법명이 ‘계차’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항상 포대 자루를 들고 다녔다고 해서 포대화상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포대화상을 미륵보살의 현신으로 여깁니다. 포대화상을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만들고 예배를 드리며 복을 비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 신앙이 널리 퍼져, 포대화상의 배를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일본에서도 포대화상을 7복신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습니다. 

포대화상은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개 삼아 자유자재하게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스님이 포대화상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대뜸 “도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포대화상은 짊어지고 다니던 포대를 땅에 내려놓으며 “이게 도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뜻을 알지 못한 스님이 “이게 무슨 도입니까?”라고 반문하자, 포대화상은 “자신이 짊어진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 도입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즉 본래 나의 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짐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 어느 것에도 걸림 없이 사는 것이 바로 도라는 뜻이겠지요. 

외국 만화영화 중에 ‘업(UP)’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어느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인데 흥미롭습니다. 가족 없이 혼자 사는 할아버지 집에 한 개구쟁이 꼬마가 찾아와 집을 하늘로 띄운다고 풍선을 매달아서 띄웁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집이 날아갈까 노심초사하며, 집이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게 밧줄로 꽁꽁 묶고 또 자기 몸에도 묶고 하늘로 못 올라가게 하였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나 역시 어떤 짐을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어떤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곰곰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포대화상처럼 포대를 내려놓는 것이 도인데, 여러분은 어떤 짐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지 스스로 생각해 보셨습니까? 

각자 내려놓지 못한 짐이 있을 겁니다. 그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짐을 내려놓으려면 내가 무슨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어떠한 욕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어떠한 생각에 얽매여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걸 알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늘 마음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순간순간 어떠한 상황에서도 마음이 깨어있어야 합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휩쓸려 가고, 싫으면 싫은 대로 짜증을 내고 살아서는 내가 어떤 짐을 짊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좋은 것을 보고 ‘아 좋구나!’ 깨어있어야 하고, 싫은 것을 보고도 ‘싫구나’ 하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증오가 일어나는 대상을 보고 거기에 마음이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아! 내가 이것을 싫어하는구나’ 하면서 이 경계 속에서 ‘내 마음이 변하는구나’라는 것을 알고 돌이키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있지 못합니다. 그러니 끌려다니기 바쁘죠. 좋은 것에 흠뻑 빠져버리고, 싫은 것에 흠뻑 빠져버리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좋고 싫음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공부를 하는 기본입니다. 

선종의 3조로 불리는 승찬 스님이 쓴 ‘신심명’에는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 단막증애 통연명백(但莫憎愛 洞然明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한 진리는 어려울 것이 없다. 오직 분리하여 가려냄을 꺼려할 뿐. 미워하고 좋아하는 차별심이 없으면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무사태평하다”는 의미입니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 차별심을 갖지 않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것입니다. 포대화상이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듯, 미워하고 좋아하는 분별심을 버리면 그 자체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결국 도라는 것, 깨닫는다는 것은 분별심으로 가득한 자신의 짐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중국의 선종사는 인도에서 온 달마대사로부터 시작됩니다. 달마대사의 법을 이은 분이 2조 혜가 스님이고, 그 제자가 3조 승찬 스님입니다. 다시 그 제가가 4조 도신이고, 5조 홍인, 6조 혜능 스님으로 차례차례 이어집니다. 그런데 3조 승찬 스님에게 법을 이은 도신 스님의 이야기가 참 인상적입니다. 

7세 나이에 출가한 도신 스님은 어려서부터 촉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신 스님의 첫 스승은 별로였던 것 같습니다. 어린 도신 스님이 보기에도 계행이 단정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도신 스님은 스승으로 섬기기는 했지만, 늘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니다. 어린 도신 스님은 법을 계속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14세 되던 해 법을 구하기 위해 당시 환공산에 은거하고 있던 82세의 3조 승찬 스님을 찾아갑니다. 승찬 스님을 만난 도신 스님은 대뜸 절을 하고 “화상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해탈하는 법문을 일러주소서”라고 했습니다. 

어린 사미승이 갑작스럽게 해탈 법문을 청하자 승찬 스님은 웃음을 지으며 “해탈이라니, 누가 너를 묶었더냐?”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도신 스님은 “아무도 묶지 않았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승찬 스님은 “아무도 묶은 이가 없는데 어째서 해탈을 구하느냐. 묶은 이가 없다면 그대는 이미 해탈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어렸지만 법의 근기가 뛰어났던 도신 스님은 그 한마디에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도신 스님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구속하지 않습니다. 싫다는 마음, 좋다는 마음은 누가 만드는 것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마음이 만들어 내고 그 마음에 의해 구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싫다 좋다라고 분별하는 그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옭아매는 그 마음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해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이렇게 말씀드려도 내려놓지 못합니다.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온 업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삶이 괴롭고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가 서방정토를 꿈꾸고, 극락을 향해 가는 길은 내려놓는 것밖에 없습니다. 내려놓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을 닦고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에게 방법만 이야기해 드리는 것이지, 하고 안하고는 모두 여러분의 몫입니다. 각자도생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것을 잡고 있어도 괴롭고, 미운 것을 잡고 있어도 괴롭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 모인 것은 인연 따라 흩어지는 것입니다. 1억원 하던 집값이 계속 오르락내리락하고, 통장에 있던 돈도 계속 내 돈이 아닌 것처럼, 내 손을 벗어나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그때뿐이지요. 그렇게 무상하게 흩어지면 아쉬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좋은 것을 잡고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괴롭다는 것입니다. 본래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인 것처럼 여기면서 잡고 있는 그것이 괴로움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을 하는 것은 사바세계에서 불보살이 있는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공부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가 차안이고, 깨달음의 세계가 피안입니다. 

피안으로 가는 방법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치 섬 하나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서 작은 돛단배에 의지해 홀로 가는 것입니다. 작은 돛단배에 혼자 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정말 막연할 수 있습니다. 바람 한 점 없는데 작은 노하나를 저으며 하염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홀로 노를 저어 가는 것이 자력입니다. 묵묵히 스스로 노를 저으면서 비록 보이지 않지만 언제가는 도달하겠다는 원력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게 자력입니다. 

그렇게 묵묵히 가다보면 언젠가 바람이 불어옵니다. 순풍이 불어오면 피안으로 가는 길이 조금은 더 쉽겠죠? 이게 타력입니다. 불보살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극한 원력으로 꾸준히 마음을 닦아가면 반드시 불보살님의 가피가 찾아옵니다. 불교가 자력의 신앙이면서도 타력을 중시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방향키를 바로 잡지 않으면 바람만 분다고 갈 수 없듯, 반드시 피안으로 가겠다는 굳은 원력이 없으면 결코 피안으로 갈 수 없습니다. 

“물거품 같고, 번개불과 같으며, 한번 피었다 쉽게 져버리는 꽃과 같은 허망한 마음을 모두 내려놓고 부처님 법을 믿고 불퇴전의 마음으로 정진하겠다”는 원력으로 정진해 나가세요. 그렇게 하루하루 정진한다면 여러분이 있는 이곳이 극락이 되고, 부처님 법이 살아 숨쉬는 불국토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함께 정진해 나갑시다. 성불하세요.

( 법보신문 2024.06.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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