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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만 마치면 그 즉시 머리 깎고 중이 되리라.”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꼭 장부로서 도를 닦아 큰스님처럼 살고 싶다”는 원력이 전부였다. 마침내 계를 수지했다. 1979년 음력 정월보름 영축총림 통도사에서다.
정안스님은 출가하자마자 병석에 누운 은사 도안스님을 1년여간 시봉했다. “절대 권승(權僧)이 돼서는 안된다. 도 닦고 공부하는 학승(學僧)이 되어라.” 은사 스님의 인도로 1980년 동국대 승가학과에 들어갔다. 입학하고 두어달이 지나자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했다.
장부로서 도 닦고 싶어 발심출가한지 어언 34년
공찰 주지 종회의원 학교소임…겉모습만 구하지 않았나
전국 대학에서 휴교령이 떨어졌고 학교문이 닫혔다. 동국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님은 날아온 영장을 받고 아수라장이 된 학교에서 휴학절차도 밟지 못하고 부랴부랴 군대로 떠났다. 1983년 봄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상황을 참작하면 복학이 어렵지 않았을텐데, 스님은 다시 대입시험을 준비했다. “내 의지와 열정을 시험하고 싶었다”고 했다. 당시 의정부에서 은사 스님을 모시고 살았던 정안스님은 서울의 입시학원 야간반을 다니면서 낮엔 스님으로서 경전을 보고, 밤에는 수험생이 되어 말그대로 ‘주경야독(晝經夜讀)’의 나날을 보냈다.
1984년 정안스님은 또다시 동국대 선학과 새내기가 됐다. ‘동대 84학번’은 그 당시 유명세를 탔다고 한다. 학력고사 만점을 받은 윤아무개 학생이 서울대 연세대와 같은 학교를 거부하고 동국대 선학과를 선택한 것. 윤 학생의 인터뷰 기사내용을 스님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삶보다 인생의 난제를 풀기 위해서 동국대를 택했다.’ 스님은 “그렇게 쟁쟁한 고득점자가 우리과에 들어왔으니, ‘평범한 스님’들은 낙방했을 것 아니냐”며 “우리 학번 스님들은 저마다 훌륭한 분들”이라고 웃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차분하고 친근한 이미지에 리더십을 겸비한 정안스님은 대학시절 학생회 지도법사, 대불련 지도법사 등을 맡으며 학업과 포교활동에 매진했다. 대학졸업 직후 당시 조계종포교원장 무진장스님의 추천으로 포교원 포교국장으로 발탁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종단종무를 보면서 동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수료한 스님은 강원에 가지 못한 아쉬움에 못이겨 뒤늦게 통도사강원(승가대학)에 들어갔다. “갓 출가한 새파란 스님들이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젊은 스님들 입장에선 출가한지 10년이 훌쩍 넘은 선배가 왔으니 불편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었다. 자기 하심하고 점검하는 계기를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도 당시 도올 김용옥이 고려대 교수직을 던지고 원광대 한의학도가 됐던 일이 회자되는 바람에, 스님의 선택 역시 ‘달라진 세상’에서 ‘기분좋은’ 풍토로 비쳐지기도 했다. 스님은 강원을 졸업하기 전인 1990년대 중반 쯤, 통도사유치원 원장소임을 맡았던 시절을 회고했다.
지금은 많이 위축됐지만, 당시만도 통도사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른새벽부터 아이들 부모들이 길게 줄을 늘어설 정도로 인기가 치솟았었다. 스님은 “종단에서 포교국장 소임을 봤던터라 나름의 노하우로 유치원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그 아이들이 이제는 다 커서 시집 장가 갔겠네…”라며 말끝을 흐렸다.
이후에 스님은 창녕 관룡사 주지로 살다가 조계종 제13대 중앙종회의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동국대 사무처장을 역임했고 출가본사인 통도사에서 한주와 기획국장 등의 소임을 봤다. 지난 2010년, 어느날 스님은 마음에 변화가 일었다. “평생 공부를 하려고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절제하면서 자기자신을 찾는 것이 중노릇인데, 30여년간 껍데기 겉모습만 찾았구나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선방서 두 안거 보내니 개운해
만행하는 마음으로 라디오 진행
마음 아프고 가난한 우리 이웃
상처 보듬고 함께 울고 웃으며
손 맞잡고 희망 일구고 싶어
스님은 그길로 선방으로 갔고 두 철을 보내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 “두 안거 참 재밌게 잘 보냈다. 수행이 재밌더라. 내가 하고 싶어서 했기 때문에 재밌는 것이다. 지난 30여년 삶이 훤히 보이더라. 언제나 나 자신을 채근하고 그저 쉽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리 재밌었을까. 스님은 연실 환한 웃음으로만 답했다. “선방에 가고 싶었는데 그동안 가지 못한 열망이 있었다. 선방의 그 맛이 깃든 숟가락 끝을 내 혀끝이 잠깐 대어봤다고나 할까. 그 나름의 느낌이 오니까 기뻤고, 그 맛이 생각의 맛과 다르지 않아 더 기쁘고 환희심이 생기는 것이다.”
비록 두 안거지만 꿀맛같은 선방생활을 회향한 스님 앞에 이번엔 마이크가 놓였다. 지난해 12월5일부터 불교방송에서 생방송 ‘정안스님의 동행’이라는 프로그램의 진행자가 됐다. 매일밤 자정부터 새벽2시까지 스님과 동행하는 이 시간이, 스님에겐 ‘만행’이다.
선방에서 날마다 새벽 3시부터 정진을 시작했다면, 요즘 스님은 라디오 부스에서 새벽2시까지 전국 곳곳으로 만행을 떠난다. 마음 아프고 가난한 이웃들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다독여주면서 함께 울고 웃으며 희망을 만들어가는 프로그램이다.
“얼마 전 생방송에서 문자사연을 받았다. 부산에 사는 한 불자가 너무 가난해서 절에 갈 수조차 없다는 내용이었다. 보시는 물질로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고 답해드렸지만, 그런 가슴아픈 사연들은 시간이 지나도 내내 마음에 맴돈다.”
생전 처음 라디오 생방송 진행을 해 본 스님은 “내가 들을 때는 방송이 뭐가 어렵나? 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진땀이 난다”면서 “‘100원의 문자정보료가 부과된다’는 내용이 실린 원고가 사라지는 통에 갑자기 당혹스러운 나머지 ‘근데 돈이 좀 듭니다. 어쩌죠?’라고 말해 지켜보던 제작진들에게 폭소를 자아냈던 적도 있었다”고 했다.
“긴장을 놓을 수 없습니다. 귀도 쫑긋하고 눈도 초롱초롱하고 스튜디오 바깥에서 보내주는 메시지도 읽고 함께 호흡하려면 두시간동안 육근(六根)에 비상이 걸립니다.(웃음) 그래도 다 끝마치고 나면 남다른 보람이 있지요.” 우리와 함께 ‘동행’하는 정안스님의 ‘만행’에서 새삼 행복한 셀레임이 감돈다.
사진 김형주 기자
■ 정안스님은 …

1959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도안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정안스님은 1979년 영축총림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80년 동국대 승가학과에 입학하자마자 5.18민주화운동이 발발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1984년 봄 동국대 선학과에 다시 입학, 1988년 졸업 후 조계종 포교원 포교국장을 역임하면서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쳤다.
1992년 영축총림 통도사승가대학에 들어가 강원공부까지 수료하고 창녕 관룡사 주지, 제13대 중앙종회의원, 동국대 사무처장 등 공찰 주지와 종단의 주요 소임을 역임했다. 지난 2010년 통도사 선원에서 2안거를 성만하고 지난해 12월부터 불교방송 ‘정안스님의 동행’이라는 프로그램 진행자로 활약하고 있다.
방송은 월~금요일 자정부터 새벽2시까지. 스님은 ‘음악테라피’ ‘정안의 책갈피’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등 흥미롭고 감동있는 코너들로 날마다 불자들과 만난다.
[불교신문 2801호/ 3월21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