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스님, 그간 편안하셨습니까? 인간사는 험악하다 해도 세월의 바퀴는 어김없이 돌아 신묘년 가을의 붉은 빛이 온 산에 번지고 있습니다. 가을걷이에, 부엌의 부지갱이도 한 몫 거든다는 추수철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신도회 임원들과 함께 ‘대장경 천년세계문화축전’에 다녀왔습니다.

대장경을 참례하고 홍류동 계곡을 지나 해인사에서 저녁예불을 모시고 내려오는 길, 계곡의 물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들리고 있었습니다.

20여년 전 청춘의 끝자리에서 인생이 품은 오의를 알아차리고자 끙끙대며 도보로 걷던 젊음은, 이제 희끗희끗한 머리칼만 남기고 줄달음치는 시간속에서 또 다른 명제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홍류동 계곡 바위에 앉아 “내가 가는 이 길이, 후회없이 내 인생을 몰입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인가?”

수없이 물음을 던지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짐하며 걷던 길이 이제는 한 사찰의 주지랍시고 신도들을 지도하는 길이었기에 스스로 헛헛한 무상을 느끼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대장경 천년세계문화축전’이 기획했던 의도가 무엇이건 전시관은 어둠과 광명의 오묘한 대비로 신비감을 주기도 했고, 100년 후에나 대장경 판각목을 볼 수 있다는 홍보에 의해 사람들은 줄을 지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장경이 갖고 있는 역사.문화적 의미나 재조대장경의 제작과정에 대한 깊이 있고 세심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초조대장경은 대각국사 의천스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라해서 1000년전에 하나하나 판각한 것을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하던 중 몽골 침입 시 병화로 인해 불타버립니다.

이윽고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다시 판각한 것이 재조팔만대장경 즉 금일 해인사 장경각에 보관하고 있는 대장경이라는 것은 교과서적인 설명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화재의 가치가

귀하고 높다 하더라도

눈먼 사람에게는 빨래판이나

짜증나는 애물단지에 불과

 

재조대장경은 강화도 선원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현재의 통설이나, 요즈음 재조대장경은 경남 남해도에 있었던 남해분사도감에서 만들어졌다는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즉 당시 최씨 정권의 실력자 최이의 매부가 남해 정림사를 창건하고 남해분사도감의 책임자였던 정안이고, 정안의 초청으로 정림사주지로 부임한 이가 일연스님입니다. 그때가 1249년 기유년의 일입니다.

일연스님의 비문에 보면 일연스님의 저서중에는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3권이 있다했습니다. 이것은 대장경을 재조할 때 참조로 한 매뉴얼집이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입니다. 또 1268년 무진년 여름, 운해사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가 열리자 일연스님이 주강사를 보았고, 낮으로는 불경을 읽고 밤으로는 교리의 핵심을 담론하였다 했습니다.

이렇듯 재조대장경의 핵심에는 일연스님이 계셨는데 ‘대장경 천년세계문화축전’ 어디에도 재조대장경 제작의 핵심인물에 관한 서술이 없었다는 것은 사전준비가 부족한 축제였지 않나 싶습니다.

초조대장경 판각 1000여년, 재조대장경 판각 750여년, 무수한 세월이 대장경위에 얹혀 있습니다. 어느 때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서원이 퇴락을 거듭하다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촌아낙이 유교경전을 판각한 판목을 빨래판으로 쓰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씨가 조선을 개창하고 국가이념을 유학으로 확립하니까 세종 때 일본이 재조대장경은 유학이 국시인 조선에서는 필요없으니 우리에게 주십사하고 몇 년동안 조르니까 왕이 급기야 주려 했답니다. 그러자 신숙주 등 몇몇 대신이 유학이 근본이나 재조대장경은 조상이 만든 문화유산이라며 불가하다 상소하여 일본의 유출기도가 무산되었다고 역사책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문화재의 가치가 귀하고 높다하더라도 그 가치를 알지 못하고, 눈먼 사람에게는 빨래판이나 짜증나는 애물단지에 불과할 것입니다.

40여년의 철권통치 끝에서 총성과 함께 사라진 카다피를 딱하게 봅니다.

J스님, 내내 청안하십시오.

[불교신문 2763호/ 10월2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