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님은 불교가 인류의 평화를 구현하는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참 자아를 찾는 본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내 것을 고집하면 내 것 하나 밖에 없지만 나를 버리면 천지가 내것이 되는 이치를 깨닫고 실천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우리 모두가 부처되는 길 고민하는 게 출가”
스님들이 국민에게 참마음 알려주고
국민들이 받아들이면 선진국 실현돼
지금으로부터 49년 전 1960년11월24일 6명의 비구들이 대법원에서 할복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일제시대 유산인 대처제도를 없애고 불교 본래 제도인 청정비구 승단으로 되돌아 가기 위해 펼쳤던 정화운동이 대법원에 의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조계종단을 출범 시킨 1955년의 비구 대처 간 결의가 잘못됐다는 판결이 나온 것이다. 조계종단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비상한 수단 밖에 없다고 판단한 청담스님은 6명의 젊은 수좌를 불러 순교토록 했다. 그 중 한 명이 월탄스님이다.
지난 11월17일 무심천변에 자리한 청주 용화사. 음력 초하루날 법문을 마치고 나온 월탄스님을 만났다. 10여년 만에 뵙는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제 분규의 아픔도 사라지고 스님은 젊은 시절처럼 안거 때면 선원에서 가부좌를 튼다. 일흔 넘은 나이에 쉽지 않지만 스님은 젊은 수좌들의 귀감이 될 정도로 철저히 청규를 지킨다. 올 동안거에도 법주사 선원에 방부를 들인다고 한다.
주인을 살리고 죽었다는 충견(忠犬)의 전설이 서린 전북 장수군 오수 출신인 월탄스님은 ‘도인’이 되고 싶었다. 도인이 되려는 이유는 평화로운 인류를 건설하고 싶어서였다. 전쟁이 한 젊은이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뼈 속 깊이 심어준 것이다. 큰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할 수 있고 축지법도 자유자재로 쓰는 도인이 돼야 할 것 같았다. 김유신 처럼 머리 하얀 신선이 내려와 ‘비기(秘記)’를 줄지 몰라 3일 밤 낮을 동굴에서 물 한모금 안 마시고 기도를 했다. 책에 쓰인 그대로 믿고 따르는, 순진하면서 우직한 청년이었다. 인류평화를 고민하는 큰 꿈과 사람을 사랑하는 자비심 많은 심성의 소유자였다.
도인이 되고 싶은 열망은 지리산 화엄사에서 진짜 ‘도인’ 금오스님을 만나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선사의 길을 걷게 했다. 화엄사에서 은사스님을 모실 때도 그랬고 ‘참나’를 찾겠다며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홀로 공부할 때도 그랬다. 목숨을 걸어놓고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염두에 두고 매진했다. 길이 정해지면 좌고우면하지 않는 철저한 성격을 지녔던 것이다. 결국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무주암에서 ‘한 소식’했다.
스님의 말씀이다. “처음에는 그토록 괴롭히던 우물가 개구리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도인이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다시 3일 밤낮을 몽매에 들었는데 배도 안고프고 다리도 아프지 않고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는 경험을 했다. 모두가 일체유심조이며 마음이란 형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명과 업식에 의해 생긴 뜬구름 같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이 경지가 진정 은사스님이 말씀하신 참마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팔만대장경을 모아놓은 해인사로 갔다”고 말했다. 스님은 “하나도 배우지 않았는데 다 배웠다고 거짓말 하고 최고 학년인 능엄반에 들어갔다”며 웃었다.
강원에서 스님은 당신이 깨친 것이 틀리지 않음을 배웠다. 그런데 중생의 갖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편이 모자라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던 찰나 강원 대표로 종단을 지키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고 그 자리에서 감복한 스님은 예정에 없는 순교단에 자원했다. 백척간두에 선 종단을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으로 되살린 월탄스님은 이후 종단이 바로 선 뒤에는 자신을 더 엄하게 탁마했다. 동산스님이 백련사에 마련한 결사에 참가해 가행정진했으며 미래 동량(棟梁)을 일구기 위해 종비생 제도를 마련하자 1기생으로 입교했다. ‘리더’ 기질이 있는데다 치열한 구도정진, ‘정화6비구’ ‘종비생 1기’ 등의 타이틀이 더해져 스님을 따르는 도반들이 많았다. 세월이 흘러 자연스럽게 총무원장 등 종단의 지도자가 돼 한국불교를 이끌어야한다는 요구도 생겼다. 스님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몇 차례 총무원장 선거에 나섰지만 결실을 맺지 못하고 아픔만 겪었다. 20세의 청년이 희수(喜壽)를 앞둔 ‘노승’이 되는 동안 모든 것이 변하고 과거가 됐다.
스님은 정화 이후 종단을 이렇게 평가했다. “정화정신이 뿌리 깊게 작용하면서 종단을 운영해야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정신보다 물질을 우선시 한다. 정화 후 정신을 먼저 심었어야 했는데 우리는 가람 수호에만 열중하는 우를 범했다. 외형은 커졌는데 정작 참 불교 정신은 희석되고 말았다. 사회가 물질화 됐는데 이를 바로 잡아야할 승가도 덩달아 물질화 되고 말았다. 스님들이 한시바삐 정법으로 되돌아가야한다, 내가 부처되고 모두 부처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승려의 출가목적이자 전부이다. 우리 승려들이 국민들에게 참마음을 알려주고 국민들이 이를 받아들이면 곧 선진국이고 인류평화가 실현된다.”
정신이 중요한 것은 행복이 물질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물질이 고도로 발전하면서 희유한 일이 생겼다. “과학이 발달하고 물질이 성장하면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불교만이 미래의 종교로 살아남게 됐다. 불교 교리 사상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는 것이 과학이 발달하면서 입증된 것이다. 그런데 남는 것은 불교냐 기독교냐는 외형이 아니라 정신이다. 오직 진리라는 가치로만 살아남는 것이다. 당연히 성직자도 무의미해진다. 직업적으로 수행하고 이를 떠받드는 제도화된 종교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스스로 수행하고 자기 마음을 찾는 그런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럴 때 사바세계를 넘어서 용화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스님이 주석하는 사찰이 용화사다. 모든 중생이 스스로 업장을 소멸하고 십선(十善)을 실천해서 이 땅에 구현한다는 이상세계인 용화세계가 스님이 그리고자 하는 세상이며 청년시절 꿈꾸었던 세상이다.
스님이 그렸던 세상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구현될까. 스님은 ‘너와 나를 구분지어 미워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모두가 나라는 생각을 갖는 그런 세계가 곧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했다. “인류 평화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我)’라는 집착을 버려야한다. 천지는 여아동근(與我同根)이다. 내가 있으므로 우주가 있고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만물은 여아동체(同體)다. 나와 너는 한 몸이다. 지구와 나는 한 몸인 것이다. 내가 없으면 이 세상은 없지만 내가 없어야 이 세상이 모두 내가 된다. 예를들어 이 절 용화사를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나머지는 모두 남의 것이 된다. ‘나’ ‘나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가는 곳 마다 시비가 없어지고 모두 반기는 것이다. 집착할 것이 없으니 걱정도 없다. 모두 그같은 생각을 갖는다면 곧 인류평화가 그 속에 실현되는 것이다.” 인류 평화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찾는데서 시작된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스님은 그래서 생각은 쉽지만 실제 몸으로 체득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에 늘 명심하고 다시 붙잡기를 반복해 뼈속 깊이 각인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나라는 고집을 버리기가 참으로 어렵다. 버렸다 버렸다 했는데 이 나이 들도록 버리지 못한게 더 있더라. 그래서 나부터 수행하는 모습 보이고 형식이라도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자 해서 늦바람이 들어 선방에 다니고 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 ‘보살 노릇 못하면 쪼그려 앉아라도 있자’는 마음으로 다닌다”며 웃었다.
청주=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사진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월탄스님은…

1937년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1955년 화엄사에서 금오스님을 은사로 득도. 1960년 정화 6비구, 종비생 1기로 1968년 동국대 불교과 졸업, 1973년 동대학원 석사, 조계종 4, 5, 6, 8, 9, 10대 중앙종회 의원, 8대 종회의장 역임. 조계사, 전등사, 법주사 주지 역임, 제방선원에서 정진 중.
[불교신문 2579호/ 12월2일자]